1987년 2월호 창간한 빌리어즈(월간 당구) 지령 통권 400호 발행...34년의 당구 역사 기록
1993년 '18세 미만자 당구장 출입금지' 헌법 소원 당시 제출한 증거물의 90%가 '빌리어즈(월간 당구)' 기사와 칼럼
400호의 오늘이 있기까지 지원 아끼지 않은 당구용품생산 및 유통업체에 감사의 뜻 전해

2020년 8월호로 <빌리어즈(월간 당구)>가 지령 통권 400호를 발행했다. 한국 잡지계에서 통권 400호 이상을 발행한 월간지는 아마 열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지난 33년여의 세월을 뒤돌아보니 감회가 새롭고 회한이 느껴진다.   

필자가 1986년 10월에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허가증이나 다름없는 <월간 당구>의 등록증을 받아들고 당구계의 유일한 법정단체인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박성오 회장을 방문해 협업을 제안하자, 당구계의 전문잡지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박 회장과 배석한 임원들이 흔쾌히 응낙했다. 그리고 <월간 당구>의 편집 고문으로 조동성 씨를, 영업 고문으로 대한당구협회 제8대와 9대 회장을 역임한 양창종 씨를 추천해 주었다. 

그리하여 3개월 뒤에 1987년 2월호를 창간호로 발행하였으며, 대한당구협회 임원들이 참석한 <월간 당구>의 앞으로의 역할에 대한 특집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이 좌담회에는 대한당구협회 김명석 부회장(선수 담당)과 신항균 선수국장, 그리고 (주)허리우드 창업자인 거산산업 홍영선 대표도 참석해 의견을 개진했다.  

당시 당구는 정부로부터 유기(遊技)로 취급되어 ‘공중위생법’의 적용을 받아 당구에 관한 모든 업무는 보건사회부 산하의 당구장업주 단체인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가 관장하였으며, 대한당구협회 정관에 ‘선수국’을 두어 경기인들을 통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당구선수들은 일본 선수들과의 교류전을 통해 세계의 당구 흐름을 알게 되었고, 당구가 유기로 치부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안타까움과 불만을 삭이고 있었다.

당구가 유럽의 왕실에서 기원한 귀족 스포츠로, 세계캐롬당구연맹이 결성되어 당구월드컵을 개최하고 있고, 포켓볼과 스누커 종목도 국제 조직이 결성되어 각종 세계대회가 빈번히 열리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당구가 너무나 천대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스러워 했다.  

때마침 <월간 당구>의 창간은 이런 당구인들의 절실한 여망을 대변하고 달성하는 데 유용한 수단과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월간 당구>는 매호마다 ‘당구는 스포츠’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기획 기사를 싣고 필자의 칼럼으로 이를 강조했다.

이러한 본지의 역할과 당구인들의 노력이 주효하여 마침내 1989년 7월에 당구장이 체육시설로 인정되는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당구는 유기의 굴레를 벗고 보건사회부에서 체육청소년부로 이관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것은 ‘스포츠 당구’를 지향하고 달성하는 첫걸음에 불과했다. 체육시설로 승격한 당구장 출입문에 ‘18세 미만자 출입금지’라는 표시가 그대로 걸려 있는 사실에 비분강개한 대한당구협회 은평지회 박기호 회장이 1993년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여 재판관 전원 일치의 위헌 결정을 받아냈다. 이때 재판부에 제출한 증거물의 90%가 <월간 당구>의 기사와 칼럼이었다.  

1998년에는 방콕 아시안게임에 당구가 처음으로 종목으로 채택되었는데, 현지에서 열린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집행위원회에서 차기 개최국인 한국의 부산 아시안게임에 당구가 종목으로 탈락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 소식에 한국 당구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에 필자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구 정식종목 채택 대책위원회’ 구성을 제의하고 반드시 종목 채택을 이루자는 칼럼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이 제의에 적극 찬동한 (주)허리우드 홍광선 대표와 대한스포츠당구협회 김영재 회장 등이 참여하여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아시아당구연맹 등 국제기구와 연대한 끝에 2000년 11월 부산에서 열린 OCA 집행위원회에서 종목 채택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2002년 3월에는 당구계 전 부문이 참여하는 ‘당구발전협의회’ 구성을 제의하며 대한당구연맹의 대한체육회 정가맹을 지원하고 불황에 처한 당구계의 활로를 모색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태동한 ‘당구발전협의회’는 2002년 6월에 한국 최초의 당구용품생산・유통업자들이 결속하는 ‘한국당구용품협회’를 결성하게 되었으며, 2002년 11월에는 협회 총회 자리에서 협회 창립의 공로를 인정하며 본지 통권 200호를 기념하는 케이크 커팅식을 베풀어 주었다.  

2014년에는 한국 당구의 치부(恥部)라고 할 수  있는 초・중・고교 앞 정화구역에서 당구장 설치가 금지되고 있는 현실임에도 당구계의 단체나 어느 누구 한사람 이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필자가 당구 단체들에 대책위원회 설립을 주장하고 대한당구연맹과 국민생활체육전국당구연합회 등 당구계의 법정단체 및 임의단체 6곳의 동의서를 받아 청와대의 규제개혁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한 결과, 해당 기관인 교육부로부터 당구장 금연이 전면 시행되면 정화구역에서의 당구장 설치 규제를 해제하겠다는 회답을 받았다.  

또한, <빌리어즈(월간 당구)>는 대한당구연맹에 유능한 회장을 모셔오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빌리아드뱅크의 이영재 대표가 재력가로 알려진 유태성 씨를 대한당구연맹 회장으로 천거해, 제2대 김영재 회장으로 하여금 당구계의 발전을 위한 헌신적인 회장직 사퇴를 이끌어냈고, 유태성 회장을 제3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당구통합단체 사단법인 대한당구연맹 초대 회장 선거 때는 구리월드컵조직위원회 임장영 위원장의 천거로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역임한 이참 씨를 소개받아, 이런 분이 대한당구연맹 회장을 맡는다면 당구의 위상이나 발전에 비약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회장 후보로 내세우는 데 동의하고 힘을 보탰으나 선거인단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다. 만약 그때 선거인단이 진영 논리를 떠나 냉철하게 회장을 선출했다면 지금 당구계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본지 창간 당시에도 전국의 당구장, 즉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회원수는 2만 곳을 웃돌았다. 그래서 그중 1만 개 당구장에서 한 권씩 잡지를 구독해 주면 경영은 충분히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양창종 고문과 필자는 대한당구협회 각 지회를 방문하거나 전화로 잡지 구독신청을 받았다.  

창간호 8,000부를 발행해 30개 지회에 배포했다. 그러나 잡지 대금은 거의 걷히지 않았다. 필자는 2개월이 지난 뒤에야 당구장 업주들은 ‘잡지는 공짜로 주면 보아도 돈을 주고 사서 보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잡지 운영은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구계의 현실은 규모면에서 크지 않은 편이라 매월 업계에서 잡지 경영에 필요한 만큼의 광고를 유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가 발행하던 <월간 주유소> 잡지의 판권을 양도함으로써 초기의 재정적 적자를 메워 나갔다.  

필자는 잡지 발행만으로는 현상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출판을 겸업하기로 하며 거기에서 발생한 이익금을 <월간 당구>에 충당했다. 

이렇게 해서 10년을 버텨온 끝에 당구의 스포츠화가 진전되면서 당구업계도 점차 규모가 커지고 호황을 맞게 됨으로써 <월간 당구>의 손익분기점도 찾아왔다.  

지령 통권 400호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당구용품생산・유통업체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자리를 빌어 그간 지속적으로 광고로 본지 발행에 기여한 당구용품업체에 깊은 감사를 전한다.

특히 창간호부터 400호까지 단 한 차례도 빠짐없이 광고를 게재한 이영식・이호식 형제분이 운영한 ‘빅토리3515고무쿠션’의 동진산업사(빅토리폴리머)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그 밖에 홍영선・홍광선・홍용선 대표로 이어오는 (주)허리우드와 민영길 회장・민상준 대표의 민테이블, 권오철 대표의 (주)한밭, 정종명 대표의 SP가구, 정정우 대표의 빌텍코리아, 이종훈 대표의 현대시스템, 심상배 대표의 (주)볼스타, 박석준 대표의 유니버설코리아, 강인용 회장의 쉐빌로뜨 당구대, 이병규 대표의 빌플렉스, 오성규 대표의 (주)코줌, 아라미스볼의 살룩, 조영만 대표의 큐맨당구재료, 마광현 대표의 (주)오페라 등에 지면을 통해 감사의 뜻을 전한다. 

필자는 통권 400호의 월간지를 발행한 33년여 동안 많은 당구인들을 만났고 많은 당구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필자에게 행운이었고,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당구대를 제작한 승리기업사의 방달성 사장을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쪽 지하상가에 있는 그의 딸이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만났다. 그는 최초의 선수단체 대한당구선수회를 전국 조직으로 창립했고, 최초의 당구잡지 <월간 당구>를 2호까지 발행했던 선각자였다. 필자가 <월간 당구>를 발행한 지 1년쯤 되던 무렵인데, 그는 필자에게 “김 사장, 대단해”라고 하며, 그가 소장하던 몇 가지 자료와 그가 발행한 잡지 2권을 건네주고는 1960년 이전의 당구계 사정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본지의 편집 고문을 맡았던 조동성 씨를 비롯해 김영재 회장, (주)허리우드 창업자 홍영선 씨, 세계적인 당구 스타 이상천 회장, 그리고 김경률 선수를 비롯한 국내 톱 선수들을 만나 대담을 나누었던 것은 참으로 귀중한 필자의 당구 인프라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귀중한 인프라와 지령 통권 400호의 자산을 동원하여 <한국당구사>를 집필하고 있다. 한국의 당구사는 누군가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 역사를 후대에 남기지 못하면 수치가 된다. 그러나 역사는 고증과 자료에 의해서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한국 당구는 1884년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2019년까지는 135년의 장구한 역사다. 이 대장정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출간이 다소 늦어졌다. 그러나 95% 능선을 넘었으므로 곧 출간의 날이 올 것임을 밝혀 둔다.  

통권 400호를 발간하기까지 도움을 준 당구계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앞으로 <빌리어즈(월간 당구)>가 지속적으로 발행되어 당구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성원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린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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