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베겔 3쿠션 당구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한국의 이충복(시흥체육회)과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의 경기 장면. 이충복은 앞서 32강 리그전에서 야스퍼스에게 무려 22점 차의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준결승전에서도 50:47로 승리하며 한 대회 본선에서 야스퍼스를 두 번 모두 꺾었다.  사진=Ton Smilde
지난 10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베겔 3쿠션 당구월드컵' 준결승전에서 한국의 이충복(시흥체육회)과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의 경기 장면. 이충복은 앞서 32강 리그전에서 야스퍼스에게 무려 22점 차의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준결승전에서도 50:47로 승리하며 한 대회 본선에서 야스퍼스를 두 번 모두 꺾었다. 사진=Ton Smilde

지난 10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베겔 3쿠션 당구월드컵’ 본선 32강 리그전에서 한국의 이충복(시흥체육회)이 승승장구하던 ‘세계랭킹 1위’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에게 22점 차의 참패를 안겼다. 야스퍼스가 홈에서 당한 사상 최악의 패배였다.

얼마 후 이충복은 준결승전에서 야스퍼스를 다시 만났다. 한 대회에서, 그것도 본선에서 야스퍼스와 두 번 대결해 모두 승리한 선수가 과연 있을까. 게다가 야스퍼스는 코로나19 이후 재개된 세계대회에서 모두 준결승 이상에 진출하며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고, 22점 차 패배에 대한 설욕과 함께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못 이룬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이충복을 상대로 반드시 승리를 해야 했다. 

그런데 준결승전에서 이충복은 야스퍼스를 36이닝 만에 50:47로 다시 한번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충복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야스퍼스를 상대로 22점 차의 대승과 본선 2승을 거두며 생애 첫 당구월드컵 결승 진출을 이뤄낸 것이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현실로 만든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이충복이 야스퍼스에게 기적의 2승을 거둔 큐는 국산 기술로 만들어진 TPO-K의 ‘루츠케이’였다. 이충복은 순수한 한국 기술로 만들어진 큐를 사용해 이러한 대기록을 작성했다. 이것은 이제 한국의 기술이 전 세계 어디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된 기록이다. 

이충복의 '루츠케이 큐'를 만든 TPO-K 전남수 대표.  사진=김도하 기자
이충복의 '루츠케이 큐'를 만든 TPO-K 전남수 대표.  사진=이용휘 기자

선수 시절 ‘한국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20여 년이 지난 현재, 순수 국산 기술로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최상급 당구 큐를 생산하게 된 TPO-K 전남수(53) 대표는 “하이엔드급 제품으로 이제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전 대표는 당구선수와 당구인들에게는 아주 잘 알려진 당구계 인사다. 90년대 초반부터 선수생활을 했고, 2004년에는 고 이상천 회장이 대한당구연맹을 맡으면서 이사로 발탁해 연맹 행정을 오래 돌봤다. 전 대표는 이상천 집행부를 거쳐 이유병, 장영철 집행부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을 당구연맹 이사로 활동해 왔다. 당구 행정과 엘리트 선수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일을 주로 해왔던 전 대표는 당구용품을 유통하는 전문가이기도 했다. 

선수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큐와 용품에 관심을 갖고서 연구를 해오다가 행정가로 변신해 한국 당구를 위해 노력하던 그는 일본 제품이 국내를 장악하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에 한국 순수 기술의 당구용품 생산을 표방하며 제조를 시작했다.

2009년에 ‘한국의 자부심(The Pride of Korea)’의 영문을 줄여서 TPO-K라는 브랜드를 만들었고, K-1 라사지와 훗날 유명해진 실리콘그립 등을 개발해 출시했다. 이후 오히려 일본에 수출을 하게 되는 역전 현상을 만들기도 했다. 한국의 좋은 당구 인프라와 세계적인 시장을 일본과 외국 기업에 내줄 수 없다는 생각이 결국 국산 제품의 세계화가 시작된 첫걸음이 됐다.

2010년대를 넘어가면서 세계적인 반열에서 한국 당구 큐가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느낀 전 대표는 당구 큐 생산에 전념하기 시작해 제스트 큐와 루츠케이 큐를 개발하게 됐다. 선수 시절부터 큐에 대한 연구를 해왔던 전 대표는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생산 공장을 보유한 중국의 대규모 시설이나 세계 유수의 당구 큐 제조 현장을 보면서 하이엔드급 모델의 큐는 오히려 우리가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한국식 루츠케이가 탄생, 이충복과 김행직, 스롱 피아비 등 정상급 선수들의 선택을 받는 세계 최고의 큐로 성장하게 됐다.

전 대표는 “하이엔드급의 큐는 기술력은 물론, 많은 시간과 노력, 장인 정신 등이 깃들어야 만들 수 있다. 겉모양보다는 내부 구조에서 큐의 밸런스가 완벽해야 하고, 목재와 금속, 플라스틱 등 이질적인 재료의 조화가 빈틈없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루츠케이를 만들었다”라고 루츠케이 큐의 개발 과정을 밝혔다. 그러면서 루츠케이를 만드는 전 대표를 비롯한 기술자들 모두 선수 출신으로, 오랫동안 함께 큐 개발을 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루츠케이 큐'의 대표 선수 이충복(위)과 김행직(아래).  사진=이용휘 기자
'루츠케이 큐'의 대표 선수 이충복(위)과 김행직(아래). 사진=이용휘 기자

그는 “만들어서 직접 쳐보고 장점은 살리고 단점을 개선하는 과정을 거쳐 루츠케이 큐가 탄생했고, 선수들이 시합에서 루츠케이 큐를 들고 경기하며 기술력이 증명된 오로지 플레이어를 위한 큐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루츠케이 큐가 세계적인 하이엔드급 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기다림과 인고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보통 큐를 만드는 과정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 특히,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루츠케이 상대는 “상대를 한 번에 다듬는 것이 아니라 0.2mm씩 총 16번 가공을 한 결과물이 루츠케이 상대다. 1번 가공에 최소 15일이 걸린다. 16번 가공을 거치는 동안 정확한 기술과 시간 등 많은 노하우가 집약돼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공장 입장에서 좋은 큐는, 원가 아끼지 않고 좋은 목재를 사용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술력을 모두 투자해 제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당구선수들이 세계 정상에 올라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한국 당구가 10여 년 동안 세계 정상을 여러 차례 올라간 것처럼 한국의 당구용품도 이제 세계 정상급의 수준에 올라섰다. 이 모든 것은 한국 당구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도전과 인내, 투자의 삼박자가 이뤄낸 산물이다.

이충복과 김행직, 스롱 등 정상급의 선수들이 이를 증명했고, 앞으로도 많은 루츠케이를 든 김영섭, 박동준, 이태현, 이유주 등 더 많은 선수들이 세계 무대에서 한국 당구를 증명할 것으로 기대된다. 앞으로 TPO-K는 서울 양재동에 전시장 겸 AS센터를 운영하며, 유저들이 보다 쉽게 큐를 접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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