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오래전 변방에 있던 한국 당구는 선구자들의 영향으로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올라왔다.

한국 당구의 전설로 불리는 이들, 고 이상천(1954-2004) 회장과 고 김경률(1980-2015) 선수로 대변되는 선구자들은 열강을 제압하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증명해냈다. 그 성과로 세계의 시선은 변방의 아시아를 다시 주목했고, 후진을 양성하며 빠르게 성장하는 한국 당구는 어느새 전 세계 당구의 발전을 도모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됐다.

선구자들의 성과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대를 이어 후진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그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기 마련이다. 일본의 당구는 일찌감치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왔지만, 산업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아울러 후진 양성에 실패하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에 한국은 일본의 실패를 거름 삼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진주 같은 유망주들이 하나둘 두각을 나타내면서 세계 정상급 선수와 마주하게 됐다는 사실이 가장 돋보였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기폭제

1998년생 조명우(실크로드시앤티)는 가장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9살 때 처음 당구 큐를 잡은 조명우는 초등학생 시절에 나간 학생당구대회에서 고등학생을 이기고 결승에 올라가는 모습이 알려지면서 ‘당구 신동’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 이후 당구선수를 목표로 훈련을 받은 조명우는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실력을 쌓아 주니어급에서 국내 최강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6살 많은 선배 김행직(전남)이 끌고 갔던 주니어 라인에서 조명우는 기폭제 같은 존재였다.

지금의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의 당구선수들이 선구자들의 길을 쫓았다면, 그다음 세대와 다다음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에는 조명우가 있었다. 조명우의 성공은 한국 당구의 미래 비전과도 같은 중대한 일로 평가받았다.

3쿠션 선수로 큐를 잡는 10대의 어린 선수들은 만약 조명우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목표를 찾고 미래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조명우는 그들에게 선구자나 다름없었다.

10대 시절에 처음 엘리트 당구선수의 길을 닦았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 당구 명문고로 평가받는 매탄고를 거쳐 한체대에 당구 특기생으로 입학한 조명우는 고교 당구부와 대학 당구선수, 그리고 실업으로 올라가는 엘리트 코스를 그대로 밟았다.

조명우보다 더 화려했던 매탄고 선배 김행직도 있고, 매탄고-한체대 코스를 먼저 밟은 김준태(경북체육회)도 있지만, 조명우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있다.

조명우는 만 18세에 불과했던 지난 2016년에 조명우는 ‘구리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진출하며 비상한 실력을 보여줬다. 경력과 연륜을 무시 못 하는 3쿠션 당구계에서는 가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날의 기록을 돌아보면, 당시 최종예선에서 김행직에게 22이닝 만에 40:32로 승리해 조 1위로 최연소 32강 진출을 달성한 조명우는 이집트의 강자 사메 시덤을 20이닝 만에 40:36으로 제압하고 16강에 올라갔다. 16강전 상대는 무랏 나시 초클루(튀르키예)였다. 조명우는 잘 나가던 초클루를 22이닝 만에 40:28로 가볍게 꺾었고, 8강에서 최성원(부산체육회)을 상대로 22이닝 만에 40:39로 1점 차의 신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전에서 그 대회 우승자인 제러미 뷰리(프랑스)에게 20이닝 만에 25:40으로 져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조명우는 불과 만 18세의 나이로 ‘탈 주니어급’의 선수로 성장했다는 전례 없는 놀라운 사실을 입증하며 세계 무대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세계대회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당시에 너무 어렸던 조명우를 만나기 부담스러워하는 기류가 흘렀다. 주니어 선수였던 조명우를 시니어 선수들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당연한 흐름이었다.
 

조명우와 부친 조지언 씨.
조명우와 부친 조지언 씨.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탈(脫) 주니어

만 22세 이하 주니어에서 조명우는 상대가 없었다. 평균 2점대의 애버리지를 보유한 조명우를 1점대를 겨우 넘는 주니어 선수들이 이길 재간이 없었다.

조명우는 구리 당구월드컵 4강에 오르기 3년 전인 2013년에 처음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출전했다. 주니어 세계 무대에서 조명우도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첫 대회에서 4강과 이듬해 준우승에 그쳤던 조명우는 2015년에 예선탈락 후 2016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주니어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당시 대회가 이집트에서 12월에 열렸으니, 주니어 챔피언보다 당구월드컵 4강에 먼저 올라간 셈이다.

조명우는 2017년에 4강에 머물렀다가 2018년과 2019년에 연속 우승하며 주니어 세계선수권을 3회 우승과 준우승 1회, 4강 2회 등 6번의 입상으로 마쳤다. 연속 우승 횟수는 김행직에게 미치지 못했지만, 애버리지만큼은 여러 번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는 등 주니어를 넘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2017년 세계선수권에서 6이닝 만에 25점을 쳐 애버리지 4.166을 기록했던 조명우는 2018년 우승 당시에는 애버리지 5.000의 주니어 세계신기록과 통산 애버리지 2.022의 가공할 샷 감각을 선보였다. 

이처럼 주니어 대회에서 조명우가 남긴 기록은 사실상 난공불락이다.

조명우가 마지막으로 출전한 2019년까지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역대 17번의 2점대 경기가 나왔다. 그중에서 과연 조명우는 몇 번이나 애버리지 2.000을 넘었을까.

조명우는 혼자서 무려 9번이나 2점대의 기록을 남겼다.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 앞으로 주니어에서 조명우 이상의 선수가 나와서 더 큰 활약을 펼치길 기대하지만,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2016년, 변화의 시작

과거 선구자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선구자의 뒤를 쫓았던 후진들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시대다. 많은 우수한 선수들이 어느덧 세계적으로 성장한 지금은 여러 세계대회에서 울리는 이 선수들의 승전고를 자주 듣게 된다. 

그중 조명우는 한국 당구의 미래를 짊어진 선봉장으로 불린다.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오는 몇 년 사이에 오래전부터 그에게 기대했던 모든 가능성이 현실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10대 초반의 조명우를 보는 노년의 당구선수 출신 관계자는 “명우야, 열심히 해라. 네가 잘해야 된다”라는 말을 수없이 건넸다. 그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이유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어린 조명우에게 모든 것을 전달할 수는 없었다. 

재능이 출중한 어린 선수를 알아본 선배 당구인들이 당시 미래가 불투명했던 한국 당구의 미래를 걱정하며 조명우라는 샛별에 거는 기대를 전할 수 있는 최선의 문장이었다. 본능적으로 절제하고 가다듬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조명우의 주니어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았던 2015년까지 걱정하는 당구인들이 많았다. 한국에서 열렸던 2015년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첫 우승을 기대했던 터라 조명우의 탈락은 한국 당구 전체에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던 것이 이제 갓 10대 중반을 넘어선 조명우에게는 기회가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조명우는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급성장한 모습으로 세계적인 선수들을 꺾고 최연소로 당구월드컵 4강에 진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한 번의 당구월드컵 입상 이후 조명우는 완전히 달라졌다. 눈에 띄게 애버리지가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고참 선수들을 압도할 만큼 노련해진 경기 운영이 돋보였다. 

이듬해인 2017년 3월에 이집트에서 열린 룩소르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조명우는 한 번 더 4강을 밟았다. 32강에서 에디 멕스(벨기에)를 16이닝 만에 40:31, 16강에서는 쩐뀌엣찌엔(베트남)을 24이닝 만에 40:38로 꺾었고, 8강에서 맞붙은 사이그너도 단 16이닝 만에 40:34로 꺾는 기염을 토했다. 준결승에서 폭주한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에게 12이닝 만에 40:12로 졌지만, 조명우의 4강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대회였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뜻밖의 공백

7개월 후 조명우는 프랑스 라불에서 세 번째 4강 진출에 성공했다. 32강에서 허정한(경남)을 25이닝 만에 40:38로 꺾고 16강에 올라 비롤 위마즈(프로 전향)를 16이닝 만에 40:14로 제압하더니 8강에서 쩐뀌엣찌엔을 21이닝 만에 40:32로 누르고 다시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프레데릭 쿠드롱(프로 전향)에게 21이닝 만에 34:40으로 패하며 사대천왕의 벽에 또 한 번 부딪혔다.

2019년 7월에 포르투갈에서 열린 포르토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조명우는 역대 네 번째 4강 진출을 달성했다. 

2개월 뒤인 2019년 9월, 조명우는 한국에서 열린 초청시합 LG 유플러스컵에서 토브욘 블롬달(스웨덴)과 멕스, 타스데미르, 사이그너 등을 연달아 꺾고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생애 첫 세계대회 우승과 동시에 최고 상금 8000만원을 획득하며 확고한 세계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됐다.

이 시기는 조명우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명우는 우승상금 5000만원이 걸렸던 KBF 슈퍼컵과 서바이벌 대회 4100만원 등을 포함해 단기간에 2억원이 넘는 상금을 받는 등 정점을 찍었다. 코로나19로 군 입대를 결정하기 직전인 2019년 말에 스위스에서 열린 로잔 빌리어드 마스터스에서도 조명우는 4강에 진출했다.

지난 2020년 8월 10일에 조명우는 강원도 화천 15사단 신병교육대에 입대했다. 당초 2021년 중순경에 입대를 희망했지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모든 대회가 중단되자 망설임 없이 입대를 선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명우는 당시 국내랭킹 1위와 세계랭킹 10위에 올라 있었다. 2019년에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조명우는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그 흐름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불가항력의 재난 상황에서 고심 끝에 최선의 길을 찾은 듯했다.

18개월의 군 복무 기간 동안 훈련 공백이 생기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과감하게 입대를 선택한 조명우는 2022년 2월까지 성실하게 군 생활을 한 뒤 만기 전역했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다시 시작된 ‘조명우의 기록’

공백의 시간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조명우의 감각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복귀 후 대회에서 조명우는 예전 같지 않았다.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3쿠션 당구월드컵에 출전하며 군인에서 당구선수로 돌아온 그는 32강 조별리그전에서 3위로 탈락하며 공백을 실감했다. 이어서 미국 라스베이거스 당구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에게 29이닝 만에 41:50으로 패해 탈락했고, 호찌민 당구월드컵에서는 최종예선의 관문을 넘지 못했다. 

조명우는 서울 당구월드컵과 네덜란드 베겔 당구월드컵에서 연달아 32강 리그전을 최하위로 넘지 못하고 큐를 접었다. 18개월의 공백이 결국 조명우의 팔을 무뎌지게 한 듯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에 열린 ‘2022 동트는동해배 전국당구대회’에서 복귀 후 첫 전국대회 개인전 우승을 차지한 조명우는 얼마 뒤 이집트로 날아가 시즌 마지막 당구월드컵 출격을 준비했다. 

이 대회 32강 조별리그에서 조명우는 산체스를 14이닝 만에 40:37로 제압하며 화려한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조명우는 조별리그를 2승 1패, 조 2위로 통과한 다음 16강에서 김준태를 19이닝 만에 50:31로 꺾고 오랜만에 당구월드컵 8강 무대를 밟았다. 조명우의 8강전 상대는 야스퍼스였다. 과거 번번이 조명우의 결승행을 막았던 야스퍼스였지만, 이번에는 살아나는 조명우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막판까지 치열했던 승부는 21이닝 만에 50:47 조명우의 승리로 끝났고, 준결승전에서 서창훈(시흥체육회)과 결승행을 다투게 됐다.

3년 5개월 만에 5번째 당구월드컵 준결승에 올라온 조명우는 서창훈을 상대로 맹타를 휘두르며 27이닝 만에 50:33으로 승리, 생애 첫 3쿠션 당구월드컵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조별리그에서 한 차례 승리했던 산체스였다. 난타전이 벌어진 가운데 조명우가 17이닝 만에 50:45로 승리하며 복귀 후 처음 세계대회 우승과 함께 생애 첫 3쿠션 당구월드컵 챔피언에 올랐다.

기다렸던 조명우의 시대는 다시 시작됐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이미 완성됐을지도 모르지만, 미뤄졌던 그 시간이 마침내 열렸다.

길지 않은 회복기를 거쳐 조명우가 공백을 극복하고 이번에 처음 정상에 섰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명우는 이제, 예전 난공불락의 기록을 이어가게 됐고, 세계 당구의 역사는 다시 조명우를 중심으로 쓰일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자 © 빌리어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